©Fred Ramage / Keystone / Getty Images 패션 디자인은 정부 정책, 관료제, 행정 절차 같은 단어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만 패션 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패션은 언제나 국가 및 도시가 산업, 노동, 수출, 문화적 위신을 조직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앤트워프 식스를 비롯한 벨기에 패션의 부상에는 당시 쇠퇴하던 자국 섬유 산업을 되살리고자 한 벨기에 정부의 ‘Textile Plan’(1981)이 있었다. 1990년대 국제적 반향을 얻은 영국 특유의 신진 디자이너 구조 역시 순수하게 서브컬처의 자생적 폭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20세기 말 영국 패션 디자인의 성장은 마거릿 대처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산업 구조 개혁의 일환으로 도입한 실업자 자영업 전환 지원금(Enterprise Allowance Scheme)을 기반으로 청년들이 스스로 창업을 시도해 온 과정과 직결된다. 심지어 프랑스 오트 쿠튀르 산업조차 2차 대전 나치 점령기 당시 당국과의 협상을 통해 원단 배급을 유지하고 산업의 베를린 이전을 막아내어 전후 자신들의 럭셔리 헤게모니의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럽 패션 디자이너들 뒤에는 패션을 문화적 선전, 일자리 재편, 경제 성장의 도구 등 정치·경제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려 했던 국가 정부의 욕망이 있었다. ©서울신문 서구 패션의 경우 유행은 왕과 귀족, 이후 부르주아들을 위한 맞춤복 문화에서 출발해 기성복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유행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거나 반하려는 시도(가령 영국 노동자계급, 미국 스트리트 문화) 등 여러 사회문화적 맥락과 얽혀 다양한 스타일의 파생으로 이어졌다. 이 역사가 오늘날 유럽의 디자이너 브랜드 생태계 기반을 이루었다면, 한국의 섬유, 패션 산업은 오랫동안 수출 주도 산업화 과정에서 값싼 소비재와 노동집약적 경공업의 핵심으로 기능해 왔다. 즉 식민 지배와 전쟁 이후 재건 과정에서 한국은 의류 공장 노동자들을 저임금의 산업 역군으로, 패션 산업은 수출 지표 달성을 위한 국가 주도 경제 개발 단계의 일부로 취급해 왔다. 이는 영국의 디자이너 패션, 이탈리아의 가족 기반 공방 생태계, 프랑스의 쿠튀르 하우스 등 패션을 고부가가치 문화 산업으로 대우하며 각자 고유한 생태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해 온 서구 사례들과 비교해 패션을 바라보는 국가 차원의 인식이 상이했음을 의미한다. ©ZHA 다만 이 차이를 패션을 인문사회과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는 서구와 달리 한국은 그러지 않았다는 결핍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패션에 투사하는 욕망이 달랐을 뿐이다. 한국도 1990년대 후반 이후 문화적 영향력 구축과 지식정보사회 이행을 위해 문화콘텐츠 산업을 국가 성장 전략에 편입하기 시작했다¹. 그 흐름 속에서 2000년 서울 컬렉션, 현재의 서울패션위크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2024년 기준 서울시의 서울패션위크 관련 예산은 패션 예산 중 17.1%를 차지하며, 서울패션위크는 시·정부 차원에서 국내 디자이너 육성 및 패션 산업 활성화를 이끄는 핵심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². 하지만 2014년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완공 이후 서울패션위크는 점점 더 패션 산업을 위한 무대보다 ‘글로벌 디자인 도시’, ‘아시아 문화 수도’로서 서울을 선전하는 도구에 가까워 보인다. 런웨이 앞줄과 포토월을 채우는 연예인들이 대변하는 뷰티, 음악, 영화 등 전방위적 한류 전시, 해외 매출 실적 중시, 해외 바이어 및 수주 성과 발표 무대 뒤에서 최소 주문 수량을 맞추지 못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신진 브랜드들과 후속 발주가 보장되지 않는 작업을 감당하기 어려운 노후화된 봉제 공장이 서로를 등지고 있다. ©Stuart Wilson / BFC / Getty Images 그러나 패션위크의 한계는 서울만이 겪는 국소적 문제가 아니다. 런던 패션위크를 내세워 ‘창의적인 패션 도시’의 이미지를 유지해 온 런던은 실상 제조업 역량이 붕괴해 도시 인지도, 상징성, 창의성을 둘러싼 이념적 가치 같은 것들만 공허하게 재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 Granary의 공동 창립자 올랴 쿠리슈추크(Olya Kuryshchuk)는 신진 독립 브랜드들이 소량 주문 때문에 고품질의 제조 인프라 접근 기회를 차단당하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실험 자체가 원천 차단되는 구조를 지적했다³. 생산 인프라가 사라진 도시에서 당장 일자리가 필요하거나 British Fashion Council(BFC)의 선택을 받지 못해 창업의 위험을 감당할 수 없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후원 없이는 패션위크 무대를 유지할 수 없는 소규모 브랜드 중심의 산업을 뒤로한 채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와 더 많은 기회가 있는 파리, 밀라노, 뉴욕 등 다른 패션 도시로 빠져나간다. BFC는 올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을 선언했지만⁴, 현시점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접근성’, ‘성장’ 같은 단어의 실효성은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Edward Berthelot / Getty Images 물론 일찍이 화려한 패션위크 뒤의 현실적인 문제, 패션위크 자체의 부작용에 주목해 패션위크를 정책 어젠다 무대로 전환하고자 한 시도들도 있었다. 가령 코펜하겐 패션위크는 2020년부터 지속 가능성 기준을 도입하고 2023년 패션위크 참여 브랜드에 이를 의무화함으로써 지속 가능성 논의를 선도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 기반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경우 디자이너가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의 취약 계층을 위하거나 지역 기반의 자생적인 생산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사회적 기업을 목표로 하는 경우 도시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⁵.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지속 가능한” 코펜하겐 패션위크⁶는 윤리적 패션 도시라는 자기 브랜딩에 머무른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속 가능성의 19개 기준이 실행 가능하지 않은 마케팅 자산에 불과하며, 실제 공급망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채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시간적, 행정적 비용이 브랜드들에 전가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⁷. 베를린의 경우, 4대 패션위크를 비롯한 패션의 ‘화려한 네트워크’와의 의도적 거리두기는 당연히 디자이너 브랜드의 생존 문제에 있어 치명적이다. 베를린 기반 디자이너들은 판매를 위해 파리로 이동하는 경우가 빈번할 뿐만 아니라⁸, 브랜드의 정부 보조금 의존 구조로 인해 독립성을 둘러싼 정치적 위험이 잔재한다. ©musinsa studio 위 사례들은 반면교사로서든 본보기로서든 현재 한국의 패션 산업과 서울 패션 위크를 돌아보게 한다. 이들의 의제 설정 시도 자체는 분명 패션 업계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들을 갱신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령 우리도 런던의 화수분 같은 신진 디자이너 저변, 코펜하겐의 지속가능성, 베를린의 사회적 기업 모델 등을 참고해 전략적으로 서울패션위크만이 제시할 수 있는 어젠다가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패션 산업과 정책의 연관성에 대해 지적했듯이, 이 사례들 역시 ‘패션’보다 그 앞에 오는 ‘도시’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런던은 창의성을 경제적 자원으로 환원했고, 코펜하겐은 지속 가능성을 자기 브랜딩의 도구로 삼았으며, 베를린은 패션 노동자들의 자율성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창의적인 런던, 윤리적인 코펜하겐, 책임 있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이미지 전시용 타이틀을 얻는 데 그치고 있다. 서울패션위크도 과거 제조, 수출 등의 단어에서 오늘날 첨단 산업, 문화, 콘텐츠 등으로 도시와 국가 이미지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그 홍보 공간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패션이 여전히 대기업, 수출, 한류, K-의 틀에서 정책의 상상력이 확장되지 못 할 때, ‘제너레이션 넥스트’들은 서울시가 아시아 패션·뷰티, 나아가 글로벌 문화 수도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동원되는 자원에 그친다. 서울패션위크가 산업 현장이 지속되기 위한 의제에 개입하지 못한다면, 서울이 4대 패션 수도의 뒤를 이어 ‘다섯 번째 패션 도시’⁹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목표 자체의 잘못된 전제만큼이나 그 결말 역시 패션 도시 담론의 한계를 반복하는 자리의 말석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¹ 1999년 제정된 문화산업진흥기본법(Framework Act on the Promotion of Cultural Industries)을 기점으로 국가는 그간 민족, 전통, 유산 보존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문화는 경제 성장을 위한 산업으로 재기획했다.² 오은주, 김수진(2025), “서울시 패션산업 현황과 서울패션위크 발전방향", 서울연구원. Available at here³ Amy Francombe (2024) “WITH COOL DESIGNER PARTNERSHIPS, CAN ECCO BECOME THE NEXT IT-FOOTWEAR LABEL?”, Vogue Business, Available at here⁴ British Fashion Council (2026), “BFC 2030 ACCESS, CREATIVITY, GROWTH”, British Fashion Council. Available at here⁵ McRobbie, Strutt, and Bandinelli (2022), Fashion as Creative Economy: Micro-Enterprises in London, Berlin and Milan, Cambridge: Polity Press.⁶ Emily Chan (2023), “How Copenhagen Became The World’s Most Sustainable Fashion Week“, British Vogue, Available at here⁷ Subir Ghosh (2025), “Copenhagen FW: How a Fashion Week’s Sustainability Claims Faced a Major Reckoning”, texfash, Available at here⁸ Cathrin Schaer (2024), “Can Berlin Fashion Week Capture - and Hold - the Industry’s Interest?”, WWD, Available at here⁹ 서울특별시(2021), “서울비전 2030”, 서울특별시. Available at here BY MUYO PARKJULY 20, 2026 >READ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READ OTHER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