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gue Runway 새로 부임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하우스를 향한 자신의 존경과 애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등 디렉터만의 하우스의 유산을 존중하는 방식을 시험받는다. 디렉터 자신의 비전을 과감히 드러내는 연출이 가미된 옷들 사이 아카이브를 어떻게 녹여내 균형을 이루는지가 향후 몇 시즌에 대한 기대를 좌우한다. 최근 들어 유난히 잦았던 대형 하우스 간 일련의 이직 소식들 사이에서, 메종 마르지엘라의 글렌 마틴스는 이 관점에서 단연 돋보이는 사례였다. 그는 디젤과 Y프로젝트 시절부터 마르지엘라의 해체주의를 이어받은 디자이너라는 명성에 부응하며, 어쩌면 올해 최고의 쇼 중 하나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평가는 사람들이 그의 컬렉션에서 그의 자조적인 농담¹만큼이나 진정성 있는 마르지엘라를 향한 존경과 애정을 발견했기에 가능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더라도 마르지엘라가 2009년 마지막 회고전을 열었던 장소에서 그의 부활을 알리듯 자신의 데뷔 쇼를 연 것, 패션 학도라면 어디서든 한 번은 봤을 익명성과 옷에 대한 존중의 상징, 나아가 당대 하이패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어버린 마르지엘라의 데뷔 쇼 S/S 89부터 등장한 마스크, 그리고 마르지엘라 하면 떠오르는 트롱프뢰유² 기법과 글렌 자신과 마틴 마르지엘라의 출생지인 플랑드르 지역의 미학을 대표하는 정물화와 고딕 건축물 요소들까지 더해지며 하우스의 기원과 상징들이 하이패션의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이게 바로 마르지엘라다”라고 생각했다는 후문³처럼 글렌 마틴스는 어쩌면 마르지엘라보다 더 마르지엘라다운 패션쇼를 선보였는지도 모른다. ©Maison Margiela 그러나 메종 마르지엘라의 아카이브를 ‘패셔너블’하게 참조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과연 하우스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는지, 존 갈리아노의 마르지엘라부터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의문을 이번에도 역시 떨쳐낼 수 없었다. 이번 쇼의 레퍼런스를 다시 살펴보면, 가령 마르지엘라가 PVC 소재를 채택했던 S/S 90 쇼는 파리 20구의 한 야외 놀이터에서 진행되었고, 초대장을 만든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했다. 즉 저렴한 소재의 업사이클링은 하이패션을 지역 커뮤니티의 일상으로 끌어들인 이 장소적 맥락을 거쳐 비로소 기존 하이패션과 구분되고, 저항의 의미가 있다. 마르지엘라의 마스크 역시 당시 슈퍼모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업계⁴에 대한 거부였다. 얼굴을 가림으로써 모델의 명성이 아닌, 오직 옷에 집중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아래 발표로 미루어 보아) 어쩌면 글렌 스스로는 마르지엘라의 시대와 확연히 달라진 지금의 환경 속에서 하우스의 가장 중요한 유산임에 분명한 마르지엘라의 태도를 계승해야 하는 자신의 딜레마를 에둘러 인정한 듯하다. 그리고 그는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 시대의 마르지엘라’를 의도적으로 자신과 하이패션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체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가령 이번 쇼에서 질식할 듯한 글렌의 마스크들은 모델의 명성을 가리고 옷에 집중하길 바랐던 마르지엘라의 메시지를 넘어 모두가 자기 PR을 하는 SNS 시대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새로운 익명성으로, 트롱프뢰유 역시 마르지엘라가 던진 진품과 복제품에 관한 질문을 넘어 AI가 생성한 이미지를 점점 더 사실과 구분할 수 없는 지금 시대에 관한 질문으로 독해해 볼 수 있다. "옷의 진정성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옷 자체가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마틴이 모델들을 가리는 것입니다. 2025년 런웨이의 성공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소셜 미디어에서 모델들과의 소통에 달린 오늘날, 이는 흥미롭고 모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⁵ ©Maison Margiela 하지만 정작 하우스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번 아티저널 컬렉션이 마르지엘라 아틀리에의 핵심인 시스템을 거부하는 태도를 동시대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견지하는지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모두가 동의한 듯한, 글렌이 호평을 받은 이유이기도 한, 이른바 ‘마르지엘라답다’라는 프레임은 비효율적이고 기괴한 해체주의, 디자인 미학과 기법이 어떻게 아카이브를 재현했는가를 다루는 분석에서 그치고 만다. 평론가들을 비롯한 업계 관계자들의 논평은 모호하고 공허한 단어의 나열일 뿐, 쇼에서 모두가 눈으로 확인한 디자인과 레퍼런스 너머에 읽어내야 할 함의를 외면하고 있다. 보그에서 정리한 이번 글렌 마틴스 데뷔쇼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평에서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⁶. 가령 한 스타일리스트는 이번 컬렉션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어우르고 있다고 평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팔레 갈리에라 큐레이터는 글렌이 마르지엘라와 존 갈리아노의 어떤 디자인을 참조했는지에 대한 사실 나열에 머무른다. 한 매거진의 편집장은 “우리의 두려움을 반영,” “연약하면서도 해방을 향한 움직임” 같은 안전하고 공허한 수사를 반복한다. 이는 소셜 미디어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평론가나 주류 매거진의 편집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의 패션 저널리스트는 그들 세계 내에서만 유통되는 안전한 용어들 안에 머물며 평을 남기거나, 컬렉션과 아카이브의 비교만 반복하는 복식사적 사실 나열에서 멈춘다. “대부분 패션 저널리즘은 역사적으로 비판을 억제한 채 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대형 패션 하우스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안젤라 맥로비⁷ ©John Chillingworth/Getty Images 그녀의 지적처럼, 이 과정에서 패션 비평은 브랜드의 (판매로 이어질 수 있는) 의도를 대신 해설해 주는, 일종의 홍보 창구에 가까워졌다. 그들이 이 점을 모를 리 없지만, 그럼에도 위에서 인용한 경우들처럼 대다수는 브랜드와의 우호적 관계와 접근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브랜드 이미지와 매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 - 주로 미학, 기술, 공예에 관한 논평 - 을 넘지 않는다. 캣워크 맨 앞줄에 자리한 사람들의 배타적 특권은 희미해졌지만, 비평과 분석이 업계의 사교 관계와 하이패션의 가격표를 정당화하는 스토리텔링 수단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패션 비평은 가공되고 합의된 동의만을 남겨긴 채, 모두가 만족스럽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구도를 유지할 뿐이다. 그러나 마르지엘라가 오늘날까지 인정받는 이유는 그의 아뜰리에가 시도한 옷의 해체가 디자인 기법을 넘어 하이패션의 제도와 관습을 향한 전방위적인 도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르지엘라가 현대 패션에서 하나의 학파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가장 많이 참조되는 디자이너가 된 이유는 그가 패션에 화려함이나 분기별 매출 성장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옷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놀랍게도) 사람들이 여기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르지엘라답다’는 수식어를 비롯해 그와의 비교는 결코 디자인에 대한 안전한 찬사, 하이패션의 모범 답안을 의미하는 정도로 사용할 수 없다. 그 이름 자체가 도발 혹은 거부의 상징이 된 하우스의 쇼라면 그곳에는 ‘모두의 동의’ 가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¹ “여기(메종 마르지엘라)에 도착했을 때, 저는 스타일리스트에게 마틴의 아카이브를 모두 가져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저는 정말 스스로에게 실망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Y/Project에서 나는 모든 걸 그대로 따라한 것에 불과했구나!’” Leitch, L., (2025) Welcome to Glenn Martens’s Maison Margiela - ‘It’s going to be quite loud’. Vogue Business. Available at here² 프랑스어로 “눈을 속이다”라는 뜻으로, 패션에서는 주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디자인 기법을 의미한다. 마틴 마르지엘라에 앞서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장 폴 고티에가 특히 이 기법으로 유명했다.³ Pérez Hernández, N.A., (2025) Maison Margiela Artisanal 2025. Metal Magazine. Available at here⁴ 당시는 린다 에반젤리스타, 나오미 캠벨 등 슈퍼모델이 현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처럼 패션업계에서 명성을 누리던 시기였다.⁵ Leitch, L., (2025) Welcome to Glenn Martens’s Maison Margiela - ‘It’s going to be quite loud’. Vogue Business. Available at here⁶ Kotsoni, E., (2025) “We like fashion again”: First reactions to Glenn Martens’s Margiela debut. Vogue Business. Available at here⁷ McRobbie, A., (2023) Fashion’s Click and Collect: A Labour Perspective. Verso Books. Available at here BY MUYO PARKSEPTEMBER 6, 2025 >READ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READ OTHER ARTICLES